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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티멘탈 밸류

    누가 그러는데 기도는 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절망을 인정하는 거래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냥 바닥에 주저앉는 거죠. 실연당한 채 누워 이렇게 생각하는 거랑 똑같아요. ‘제발 전화해줘 나를 용서해줘.’ 저는 모든 걸 망쳤어요. 그런데 마침 혼자서 울고 있었죠. 그래서 난생처음 바닥에 앉아서 기도를 했어요. 누구에게인진 모르겠지만 소리를 내서 말했어요.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혼자서는 못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집이 있어야 해요.

  • 산타의 세계, 황성희

    영화를 보다가 싱크대 앞으로 왔다
    개수대 속에 빈 그릇이 쌓여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와 내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서로 달랐다
    나의 질병은 이 둘 사이의 거리에서 비롯됐지만
    오랫동안 갈 곳이 정해져 있다고 믿고 훈련해왔다
    날마다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전화 한 통 없이 은하와 헤어진 것도 그렇고
    중앙분리대 옆에서 신발을 갈아신은 것도 그렇고
    바닥 안무 뒤에 연결 동작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간식을 먹으며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 헤어지는데
    나는 어떤 사내의 집에 오래전부터 얹혀살면서
    언제 시작됐는지 모를 춤을 멈추지 못하고
    모든 것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다가 어느 날은 그런 곳이 없다는 게
    산타의 부재를 알아챘을 때처럼 순간 깨달아지면서
    이렇게 참고 견뎌도 갈 수 있는 세계가 없다는 게
    이렇게 모아둔 의문을 해결해줄 세계가 없다는 게

  • 연인, 이영주

    네 가느다란 팔을 붙잡고 느닷없이 추방되었다 미래는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 만져보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물질 나란히 비를 맞으면 철근처럼 삭아 내리는 너와 내 팔 단백질을 거울에 비춰보면 다른 물질이 된다 보리차를 마시고 너와 나는 서로를 바라본다 거울을 닦는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 구름이 팽창한다 물질의 순서가 바뀌었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는 늘 어두운 기운이 따라붙는다 만나고 떠나고 다시 만나도 어떻게 매번 새롭지? 어제 맞은 비가 안으로 들어온다 녹아 없어지는 부위가 조금씩 넓어지나 봐 내 손이 닿으면 네 단백질이 분해되고 우리는 옥상에서 서로를 잠시 부둥켜안는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웅덩이가 얼마나 깊어져 있으려나 흐르는 시간 단위는 생각하지 말자 총격이 없어도 추방될 수 있다 빗줄기 안의 화학식이 바뀌었어 함께 비를 맞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터는 밤 투명한 물은 바깥으로 흘러가고 우리는 서서히 부식되어가는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렇게 젖어가는데 너와 나는 순서가 바뀌잖아 비를 맞으며 함께 뼛속까지 핥으면서 내 단백질이 분해된다 평생 배가 고프다니 아무것도 소화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미래는 연습하지 말자 별은 없어지면서 빛을 낸다는데 넓게 퍼지면서 손을 잡는 너와 나는
    덩어리가 된다 썩은 꿀과 같이 시큼달콤하게 녹아내리는 손